2009년 8월 20일 목요일

쿠레나이 / 카타야마 켄타로 지음 | 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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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북스토리 커뮤니티) http://www.bookstory.net/module/00_book/book_view.bs?bNO=32705



고등학교 2학년. 이 세상 모든 말이 일본어로 들린다고 자뻑해대던 시절이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루에 8시간을 일드와 애니나 쳐보더니, 어느 새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자신의 말랑거리는 정신이 헤까닥 돌아버렸던 것이다.

그 때만큼 무언가에 열중했던 적은 없었다. 눈을 뜨면 방문을 걸어잠그고 애꿎은 동생에게 짜증이나 내며 방안에서 애니나 쳐보던 병신의 얼굴이 검은 줄이 아래위로 오가는 모니터에 비춰보였다. 그게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시간이 태평양 바닷물처럼 철철 흘러넘치는 대학생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고3 때엔 억지로 안 보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또 맹렬히 보기 시작하다가 서서히 시들어간 My Japanese sub-Culture experience. 그 때는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성우들의 비현실적인 목소리와 눈깔만 X나 큰 2D 년들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지금에 와서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내가 즐길 수 있던 다른 모든 가능성, 내가 걸어올 수 있던 다른 미래, 내가 맛볼 수 있을지도 몰랐던 색다른 학창시절의 기회를, 십덕 생활이 가져가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혹은 반대로, 어차피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니 오히려 애니라도 안 봤으면 변변찮은 취미도 없었을 것이고, 새로운 생활과 문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고 이해하는 포용력도 떨어졌을 뿐더러 인생이 더욱 재미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차피 지나간 인생이니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모두 헛되다고 믿고 싶진 않다.

내게 몇 년간의 씹덕질이 남긴 유산은 이하와 같다. 프리토킹 가능한 일본어, 상당히 늘어난 유머감각,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상대를 깔보지 않는 겸손함,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 그리고 남겨진 삶.

쿠레나이. 사실 이 소설을 읽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X-japan 동명의 노래가 워낙 임팩트가 쎄서 친구가 과방 책장에 끼워놨던 놈을 양해를 구하고 모셔왔다. 작가 이름을 보면서 '이 새끼는 이름이 '개새끼'이군.' 이라는 시덥잖은 생각이나 하며.

내용은 비교적 흔한 해결사물. 비정한 운명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을 떠맡은 가련한 소년 가장이 주인공인 전형적인 장르소설로 1권만 보고 딱히 특별한 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매우 재밌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우선 재밌는 소설이다. 그러나 특별한 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다른 것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데는, 주인공 옆에 찰싹 붙어있는 히로인, 쿠로사키 쿠호인의 존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써놓고도 정신 없는 말인데, 쉽게 말해서 쿠로사키란 꼬마가 눈에 확 띌 만큼 뒤틀려져있다는 것이다.

비정의 주인공보다 더 비극에 놓일 뻔한 소녀로 등장하는 것 치고는, 이 년의 태도가 굉장히 불순하다. 어린 주제에 벌써 사기를 치지 않나(그에 넘어가는 쥔공이 병ㅋ맛ㅋ이지만), 누굴 만나도 거만하리만치 당당하지 않나, 어른들보다 훨씬 어른스럽게 굴질 않나, 그리고 사랑하는 쥔공을 위해 아픈 것도 꾹 참을 수 있지 않나. 뭐냐, 이 꼬맹이. 우주에서 떨어졌냐?

존재 자체가 신비로운 히로인과 더불어, 일본을 움직인다는 오모테 고산케와 우라 뭐시기 가문의 관계가 살짝 언급되면서, 작가가 뭔가 소설 뒤에 더 큰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의외로 선선히 자기 딸 무라사키(헉... 여태까지 잘못 썼다 그러나 고치기 귀차나)를 놔주는 쿠호인 당주가 남긴 말은 여운을 넘어 독자들에게 대놓고 쥔공의 행동의 해피엔딩을 의심하게 만든다. 과연 무라사키의 인생은 행복한 걸까? 하고.

인생을 살면서, 내 주위의 삶이 억지로 날 이 길로 빠뜨렸다고 말하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봤다.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해결사를 하게 된 것도 지극히 사소한 계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천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느랴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녀석이 안쓰럽다. 목숨을 걸고 맡는 일에 모자라, 이제는 수수께끼의 어린 애까지 맡아야 하니, 그냥 때려치고 기업에나 입사하라고 진지하게 충고하고 싶지만, 그러면 소설이 더 이상 안 팔릴 게 뻔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좀 더 고생해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녀석도 나름 즐거울 것이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라, 곁에 있고, 책임져야 할 소중한 사람이 (연령에 상관 없이) 있는 거니까.

그러니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 참 허무하게 산 주인공이지만, 앞으론 그 칙칙했던 일상에 말썽거리가 튀어나올테니.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 아무 것도 안 일어나는 인생보다는, 어디로 튀어오를 지 모르는 게 사람 사는 건데. 만화라면 죽어도 안 보던 내가 일본어를 마스터한 것처럼, 어쩌면 무라사키 쿠호인이 무라사키 신쿠로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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