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10일 화요일

추천도서, 불륜의 한국사(이은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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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자극적이다. 역사서치고 이런 자극적인 제목은 흔치 않다. 그래서 단순한 역사적 관심을 넘은 호기심이 있었다. 다른 역사서에 비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불륜'하면 외설적이고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내 호기심의 요인도 그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불륜의 역사일지라도 역사이기에 사실이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간다. 실제 일어난 애정비사라고 하니 더 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제목과 빨간 표지에서 오는 외설적인 느낌은 책을 펼치고 얼마 안 있어 사그라들었다. 내 선입견에 있던 '불륜'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례를 보면 '아름다운 불륜'이 있는데 불륜이 아름다울 수 있음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외설적인 호기심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재미와 관심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소개되는 인물과 이야기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라 할 만하다. 최소한 내게는 모두 생소했다. 몇 권의 역사서를 읽다보면 낯익은 인물과 이야기가 겹쳐지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그런 면이 없었다. 그래서 역사를 다뤘지만 신선한 느낌이 들었고, 더구나 약간은 은밀한 불륜을 다뤘으니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갔다.



저자는 불륜의 사전적 정의를 서두에서 소개한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나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은 불륜의 왕국이라 할 만하고 그것은 단순히 성적일탈만을 한정하는 게 아니라 비뚤어진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모두 불륜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그런 불륜의 역사 속에는 아픔과 상처가 따라온다. 몰랐던 한국사 이야기 더구나 그 포커스를 불륜에 맞춰진 이야기를 듣다보면, 많은 이야기를 다루지 않지만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아픔과 개인적 슬픔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이 아름답고 숭고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청나라 사람들의 성 노리개로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 라고 했다. 장유 며느리 김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나라와 남자들은 환향녀를 환영하기는커녕 멸시하고 무시했다. 그녀들은 어찌보면 온 몸으로 나라의 아픔을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돌아온 그녀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보생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와서 그녀들이 받은 건 멸시와 비난이었다. 이 얼마나 조선사회와 남자들의 이중성이 여실히 드러나는가.



'환향녀'문제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풍 부원군 장유의 이혼청구사건이 있다. 그것은 환향녀인 며느리 김씨를 아들과 이혼시킬 것을 임금에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이혼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정할 사항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임과 동시에 김씨의 이중적인 아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성노리개로 청나라에 끌려간 아픔과 조선에 돌아와서도 멸시받는 그녀의 삶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철이 힘든 시절 그를 따르던 여인이 하나 있었는데, 천하일색의 기생 '강아'였다. 둘은 민망할 정도로 나이차가 있었지만, 정철은 그녀를 품는다. 하지만 강아가 정철의 사랑을 받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이후 강아는 정철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나중에는 정철을 직접 찾아 나서지만 길이 엇갈리기 일쑤였다. 나라를 위해 왜장의 품에 안길 만큼 의기였던 강아는 정철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정철이 죽은 후까지 그의 무덤을 지키며 고결한 사랑과 정절을 지켜나간다.



그 외에도 조위, 신종호의 여인들의 이야기, 나라 공금으로 한 소녀를 살려 자신은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나중에 그 은혜를 몇 배로 되돌려 받은 것은 물론이고 나라를 구하기까지 했던 역관 홍순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가히 아름다운 불륜이라 할 만하다. 또한 조선 태종의 첫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이었던 양녕대군의 기행과 불륜은 그대로 그의 아들과 딸에게 이어진다. 그것을 보면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옛 속담이 과연 맞구나. 가정 교육이 정말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한다. 불륜을 서슴치 않은 양녕대군을 보며 자란 서산군과 구지는 자기들도 불륜을 일삼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인해 쓸쓸한 말로를 맞는다. 역시 뿌리는대로 거두는 것이 맞았다. 특히 구지는 왕족의 여자로서 노비와 관계를 맺는데, 조선사회의 왕족으로서는 실로 엽기적인 행실이라 할 만하다.



제목과 표지가 외설스런 느낌은 있지만 내용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역사 속에 가려진 이야기를 꺼내어 고려와 조선시대의 숨은 사랑과 아름다운 불륜, 불륜다운 불륜 등을 다룬 이야기를 전혀 외설스럽지 않은 느낌으로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각 이야기 주인공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저자의 기행과 상상력에서 발휘된 옛 인물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묘한 감회에 적기도 했다.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 할 만하다. 불륜이라 치부되는 이야기 중에는 부정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불륜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역사서로서 유익함이외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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